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/평가 (문단 편집) === 형주의 상실로 [[촉한]]의 [[천하통일]]은 좌절되었나? === 결과적으로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 [[천하삼분지계#s-1.1|제갈량의 융중대]]가 [[관우]]의 죽음과 형주 상실로 깨지고 이후 [[촉한]]의 천하통일이 좌절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다. 워낙 형주가 그만큼 중요한 땅이었기에 제기되는 이야기로 확실히 이로 인해 그동안 순조롭게 진행되던 촉한의 대전략은 처음으로 좌초를 맞게 된다. '''그러나 이 상태에서 아직까지 촉한의 천하통일이 완전히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.''' 당시 촉한에게는 두 가지 선택 방향이 있었다. 하나는 후일 [[제갈량의 북벌]]처럼 한중에서 진천(양주-옹주)으로 진격하여 북벌을 시작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주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. [[유비]] 본인은 형제와 같았던 최측근 장수 [[관우]]의 복수라는 명분이나 [[사섭]]을 통한 남만 자극이나 유장의 아들 유천의 익주자사 임명 건 등 [[손권]]의 도발 때문에 열받아서 후자에 더 집착했고, [[조운]] 같은 다른 중신들은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형주는 어쩔수 없으니 북벌을 시행하자는 입장으로 갈린채 [[이릉대전]]은 시작되었고, 시작은 좋았다. 무릉의 이민족들도 포섭했고, 옛 형주 지역에서 [[관우]]의 잔당들의 호응까지 있었으며, [[여몽]] 사후 다른 [[오나라]]의 장수들은 유비에게 격파되고 있었다. 하지만 이는 모두 평지가 시작되기 전인 장강 삼협의 산지였고 평지가 시작되는 이릉에서 격파되면서 말 그대로 입구컷당했다. 촉한은 이 이릉대전의 패배로 북벌을 위해 준비한 많은 물자, 병력, 인적 손실을 겪어야 했으며 건국군주 유비마저 이 전투의 패배로 마음의 병을 얻어 얼마후 승하하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. 이런 면에서라면 확실히 촉한의 천하통일 가능성을 낮춘 건 단순히 형주의 상실 때문이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촉발된 [[이릉대전]]의 실패 때문이 더 크다. 만약 여기서 5년을 더 기다려 이 자원들로 남만을 평정하고 황제 [[유비]]의 친정으로 옹양주를 공략했다고 생각해보자, 그렇게 말아먹고 5년간 뼈빠지게 재건한 촉한의 군세로도 촉한의 북벌은 순식간에 관중을 진동시킬 수 있었다. 유비가 남긴 유산들과 제갈량의 천재적인 소질로 나라를 5년만에 최대한 재건시켜 놓은 덕분이었다. 하물며 유비가 이 자원을 그대로 보존한 채 [[제갈량]]을 대동하고 직접 옹양주를 공략했다고 하면 그 파급력이 어땠겠는가? 물론 당시 [[유비]]의 나이가 묫자리나 셀 나이인 환갑이 넘었다는 게 문제지만 이릉대전이 없었다면 남만평정-북벌까지의 시간이 단축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. 물론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으므로 IF에 불과한 시나리오지만, 향후 [[제갈량]]부터 시작해 [[강유]]에 이르기까지 촉한의 눈물나는 북벌사를 생각하면 이 부분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.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손해를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지, 형주의 상실로 인한 피해가 작다는 것이 아니다. 당장 [[제갈량]]의 융중대는 하북과 중원을 장악해 하나로 만듬으로서 천하의 대부분을 장악한 [[위(삼국시대)|위]][* 하지만 당시 인구수를 보면 위:오+촉=4:3 정도의 비율로 반조위세력이 결코 압도적인 열세가 아니었다.]를 상대하기 위해 익주에서 장안으로, 형주에서 완성을 넘어 낙양으로 진격해 양한의 수도를 동시에 석권하는 방법을 제시했다. 비록 [[적벽대전]]과 익양대치로 위와 오에게 야금야금 빼앗겨 [[관우]]의 북정 당시에는 원래 형주의 삼분의 일만 남았지만, 이전부터 나중에 있을 북벌의 핵심 공격루트로 일찌감치 내정되어 있던 곳이었다. 이러한 형주 지역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'''[[촉한]]의 대전략을 처음부터 다시 구상하게 만든 큰 피해다.'''[* 그렇기에 '''성공 가능성이 확 떨어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.''' 이후 촉한의 북벌 루트는 누가 봐도 눈에 들어오는 뻔한 공격루트인 장안-양옹주 방향으로 제한되었고, [[제갈량의 북벌|제갈량의 군재 부족과 더불어 북벌 실패의 요인이 되었다.]] 위를 흔들 수 있을 제2전선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졌을 수 있다.] 유비가 중신들의 만류에도 동정을 시행한 건 이런 면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.[* 그 외에도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. 하필이면 이 시기에 [[관우]]를 비롯해 [[장비]], [[황충]], [[법정]] 등 뛰어난 장수와 모사들이 연이어 세상을 떴고 자신도 많이 늙었다. 여러가지로 후계인 [[유선]]을 생각해서라도 꺾인 분위기의 환기와 안정된 기반을 남겨야 한다는 일념 역시 있었을 것이다.] 그렇기에 후일 융중대 붕괴 이후 [[제갈량의 북벌]]은 [[한고조]]의 고사에 따라 기습으로 진행하거나 아니면 동맹인 오와 연계하거나 [[강족]], [[저]]족, [[선비]]족 등 이민족과의 연계를 생각하면서 진행해야 했다. 결론적으로 촉한은 형주의 상실로 첫 번째 타격을 입었으며, [[이릉대전]]으로 그 타격이 더욱 공고화되고 서서히 국운이 기울어져 갔다고 할 수 있다. 그 와중에도 촉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서까지 발버둥쳤지만, 결국 대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